몽골 울란바토르 소재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 모습. /하이몽골리아
몽골 울란바토르 소재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 모습. /하이몽골리아

우리 민족과 유사한 문화와 역사적 아픔을 가지고 있는 몽골과의 관계를 연구하고 이해하고자 몽골에 다녀왔다. 몽골 수도에 있는 울란바토르 대학교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그 여정을 밟으며 문화체험을 하였다.

일정 중에 울란바토르 시내 안에 조성된 ‘대암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은 울란바토르 시내를 굽어보는 자이승 전망대 앞에 있다. 이태준 열사는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의사이며 동시에 독립운동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몽골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그 이유로는 지리적 인접성, 민족적 유사성, 한국의 경제성장, 한류의 영향 등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심지어 몽골인들은 한국을 ‘설렁거스’(무지개 나라)라고 부르며 동경하고 한국인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몽골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전염병 퇴치에 큰 공을 세워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린 독립운동가 이태준 열사의 헌신적 노력도 여기에 한몫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암 이태준 선생은 1883년 11월 23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평광 마을에서 태어났다. 충의와 의기가 넘쳐났던 선조를 여럿 모신 명문 가문이었지만 농촌 살림은 매우 가난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가난한 농사꾼 집에 장남으로 태어난 이태준 열사는 평범한 농촌 청년이었지만 서당에서 한자를 익혔으며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아주 부지런하고 정직한 인품을 지닌 그는 큰 꿈과 비전을 안고 거대하고 담대한 삶을 이루기 위해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올라왔다.

무엇보다 인의를 중시하는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어 정의감이 매우 강했다. 그는 고향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 한학을 배운 뒤 경성으로 올라와 1907년 경성세브란스 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의학 과정을 마치고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의 삶을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된 이태준은 당시 최고의 도시인 경성으로 올라와 열심을 다해 의학 공부를 했다.

이태준은 1910년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치료하고 그분의 권유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 학우회에 가입했다. 1911년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일제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600여 명을 검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키자 이듬해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다. 그는 민족의식을 가다듬고 중국의 남경의 생활에서 온갖 고난 끝에 몽골 울란바토르로 가게 됐다.

대암 이태준 선생은 몽골 울란바토르뿐만 아니라 몽골의 역사에서도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몽골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던 가장 무서운 전염병인 성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돌보았기에 몽골인들에게 지금도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병원이 안정되자 모은 재산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발 벗고 나서게 됐다.

난징 기독회 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돕던 이태준은 몽골에 독립군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하려던 사촌 처남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몽골로 건너가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병원을 개원했다.

몽골에서 근대적인 의술을 펼친 그의 의료 실력은 빠르게 소문이 나 왕궁에 출입하며 왕족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에 이르렀고 몽골의 마지막 왕 보그드칸 8세의 질병을 치료하는 어의가 되었으며, 1919년 7월 최고 등급의 국가훈장 에르데닌 오치르(귀중한 금강석)을 받았다.

그는 몽골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의 연락사무소 겸 숙소로 병원을 썼다. 이태준은 김규식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파견 비용을 대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한인사회당에 지원한 독립자금 40만 루블의 금괴 운송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 가운데 12만 루블이 고륜에 도착하자 1차분 8만 루블은 김립이 이태준의 도움을 얻어 상하이까지 무사히 운반했다.

하지만 2차분 4만 루블은 이태준이 직접 옮기려다가 러시아혁명 반대세력인 러시아 백위파 군대에 붙잡혀 처참하게 살해되는 바람에 분실되고 말았다. 그가 순국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

독립운동가 대암 이태준 열사의 삶을 짧게 더듬어 보았다. 몽골을 방문하기 전까지 이태준 선생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몽골의 슈바이처를 기리는 ‘이태준 기념공원’을 돌아보며 한국인을 위한 기념공원이라서 반가웠고 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몽골의 슈바이처’로서 생애를 마쳤다.

이태준 선생은 38년의 짧은 생애 동안 주님의 참된 제자로써 사랑의 의술로 진정한 생명을 존중한 삶을 살았다. 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 모두 하나님 사랑, 영혼 사랑, 나라 사랑으로 애국애족의 생활을 실천하자.